이브 온라인이 신이 내리신 완벽한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그 게임을 오래 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올드비" 딱지를 붙인 뒤 스스로 우월감에 쩔어, 고개를 높이고 목을 뻣뻣이 하여 타인을 깔보고, 관심법이라도 쓰는지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이 모두 '린저씨'라 판단하여 '이 게임은 님이 지금까지 한 국산 게임과 다르고요'라는 개소리부터 씨부리는 이들의 출입을 금함.
1월 22일에 다음 RSS 넷을 차단한지도 8달이 지났다. 그동안 신경도 안 쓰다가 며칠전 우연히 RSS 넷에 다시 들어가보게 되었는데, 문제점들을 상당히 개선했고 꽤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RSS 넷 거부했던 사이트들을 다시 가보니 다 풀려있더라...
그래서 차단을 풀어볼까 해서 일단 시험삼아 블로그의 .htaccess 파일에서 다음 RSS 넷의 IP 주소를 삭제해 보았다. 안 된다. 아예 .htaccess 파일을 삭제해 보았다. ...안 된다. 태터 관리자 모드에서 환경 설정의 차단 리스트도 싹 비우고 이짓저짓 해봤는데 안 된다. 음... 이거 매일 새벽에 서버 갱신 할 때마다 반영되는건가?
뭐 애닳을 건 없으니 기다려보고, 안 되면 그만이지만 RSS 넷이 된다면 트래픽이라든가 좀 보고 생각해봐야겠다. 8달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구독자가 5318명으로 뜬담.
내가 운영자 중 한 명이던 게임 커뮤니티가 있다. 사이트 대장을 하던 녀석이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냥 갔다. 아무것도 문서document화하지 않고.
랜파티를 한 번 했지만 관련 자료 아무것도 없고, 게임 관련 업체들과 컨텍을 시도했던 듯 하나 관련 자료 아무것도 없고, 비젼이나 로드맵도 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남기고, 심지어는 기생하고 있던 다른 게임웹진과의 계약서도 안 주고 그냥 갔다.
난 이 황량한 인프라의 대구에 살고 있는데 서울에 살면서 이것저것 하다가 그냥 군대 갔다. ...뭐 어쩌라고?
거의 1년 가까이 됐다. 거의 현상 유지만 하다가... 기생하던 게임웹진과의 관계도 틀어졌다. 있던 자원도 깎아먹는 형국이니 누가 좋아할까. 결국 까대기 시작한다.
현재 남아있는 운영진은 운영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게임존 결별 이후로 운영진의 아티클이나, 혹은 리뉴얼 노력이나, 자료 채우기나, 뉴스같은 정성을 들이는 운영진을 보셨나요?)
오죽하면 군에 있는 운영자가 리뉴얼을 했을까요.
지금 쇼아다, 겜존과 결별한다 이야기가 떠들석 해도(말 그대로 게임보드의 존폐위기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그냥 와서 툭 뭐 파토내라, 어쩌라 이게 끝입니다. 뭔가 제안이나 결정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게 운영자 아닙니까? 아니면 일반 회원과 다를게 뭐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운영자분께서는 게임보드 소개 하면서도 자기 블러그 광고는 잊지 않으시고 말이죠.
위 글은 그 까대기 글의 일부다. 아... 강렬하다. 저 운영진이라는 거, 그냥 와서 툭 뭐 파토내라, 어쩌라 한 것도 나고 "블러그" 광고 쓴 것도 나다. 그 "블러그" 광고는 이하와 비슷하다.
이것은 내 시그니처로 당시 쓰던 모든 글에 붙이던 것이다. 제로보드에 쓰려고 만든거라 글씨라든가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근데 저게 광고인가? 그럼 웹진에 글 쓰면서 이메일 쓰면 이메일 주소 광고고 홈페이지 주소 쓰면 홈페이지 광고인가?
아니면 수정하라고 하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얼마나 내게 불만이 있었으면 게임 커뮤니티 열렸을 때 내가 쓴 글을, 들어온지 몇달이 되도록 꾹 눌러 참고 있다가 저렇게 터트리면서 조인트를 깔까. 덕분에 효과는 백푸로다 지금. 저 글 본 순간부터 속에서 열이 끓어 올라 공부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안 되고 있다.
이성적인 비판 많이 받아봤고 찌질이들의 공격도 많이 받아봤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야 하나, 제대로 까이니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자기 자신은 아티클, 리뉴얼 노력, 자료 채우기, 뉴스 같은 정성 얼마나 들였는데?
처음부터 난 그다지 관심없었고 시들하다가 애가 군대간다고 해서 맡은 거였는데 열의가 없으니 뭐 제대로 되지도 않고 욕은 욕대로 들어먹고... 군대간 애는 전경가서 날이면 날마다 IRC M$N으로 날 쪼이고 있다.
아... 우유부단. 처음부터 딱 잘랐어야 했는데 친한 동생이니깐, 괜찮겠거니 하고 그냥 지내니까 결국엔 이렇게 되는구나.
그 커뮤니티에 내가 쓴 글을 모두 다 지우고 다 때려쳤다. 아... 리뷰 한 갠가 두 개는 제공받은 게임으로 쓴 거니까 거기 올려둬야 하는데... 뭐 이 블로그에도 있으니 나중에 주면 되겠지.
1. 장학금
2. 이전 학기보다 더 나은 성적(만족이란 없다. 절대 "잘했다"라는 말은 들을 수 없다. 더 높은 점수를 따라고 한다. 국딩 때 모든 과목 100점 맞고 산수만 하나 틀렸는데 그 때도 다음엔 올백 맞으라는 얘기를 들었다).
3. 하루 수면 시간 서너시간.
4. 공부는 도서관에서(참고로 내 전공은 컴퓨터과학이다. Programming).
5. 취직은 졸업 후 1년 내에.
6. 공무원은 7급, 직장이라면 대기업.
이상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내 평생 한 번도 충족시킨 적이 없다), 온갖 짜증과 불만, 야단과 욕을 하루 24시간 중 부모님(특히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반복해서 듣게 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택시 타고 아버지 회사로 가서 아버지 차를 타고 시골로. 7시에 도착해서 아침 먹고 연장 챙겨서 선산으로. 동네 친족들 모여서 한꺼번에 해치우는 거여서 봉문 갯수 기준 한 20여개 정도 벌초한 거 같다.
예초기 돌리는 새에 낫으로 몇개 치고 나무는 손으로 뽑고 갈퀴로 긁어냈다. 아니, 전체적인 공정이 그랬다는 거고 나는 반쯤 놀았다. 날 내버려두고 간 걸 뒤늦게 알고 급하게 따라가느라 장갑이고 장비고 그냥 몸만 따라갔다; 일 시키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나 -_- 불러주지 좀;
구름 때문에 해도 안 떴는데 정말 엄청난 더위였다. 땀이 줄줄줄 흐르고... 골이 띵했다. 점심 먹기 전에 마치고 시골집에 와서, 돌아오자마자 찬물로 샤워하고 옷 싹 다 갈아입었는데 머리가 아픈 건 낫지를 않더라...
점심 먹고 쉬다가 오는 길에 구미 들러서 저녁 얻어먹고( -_-;) 대구로 왔다. 오니 저녁 9시. 그리고 낮에 무진장 잤더니 잠이 안 와서 고생했다.
매년 부모님만 가고 난 안 따라갔는데 이제 데려가는 걸 보니... 흠. 뭐랄까 감상이 묘하다.
8월 6일, 7일에 걸쳐 서울에 갔다왔다. 블랙 로터스 길드 오프 모임에 참석한 거다. 방학 서울 방문은... 전이었다면 아스(경덕)네 자취방에 가서 2박 3일 뒹굴면서 게임하다 오는 거였겠지만 이놈은 군대 갔고.
모임 장소는 Soo PC방이었고... 거기서 만나서 저녁 먹고 와우에서 전쟁, 다시 술 마시고 와우에서 게임하는 뭐 그런 순서였다. 당연히 날밤까는 일정이고.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지만 뭐 게임 상에서 맨날 보던 길드원이니까 그런 건 덜했고.. 술 먹고 3시 쯤에 기절했는데 깨어나보니 대부분 돌아가고 없더라. 5시 쯤에 섭다가 터져서 그랬다는데, 아쉬웠다. 뭐 일단 다들 얼굴은 봤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거겠지.
재미있게 놀고 얘기하고 그래서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와우에서의 전쟁은 좀 그랬다. 다들 말 오지게 안 듣두만. 대도시 레이드는 좀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인 듯 싶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PC방은 사양도 구리고 관리 상태도 구리고... 시파 장사하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아, 그리고 웽 누나는 정말 미인이더라. 그리고 세상에 법사쿠키님이 여자였다! 근데, 어차피 온라인에선 성별이 없는 것, 무슨 의미가 있으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대전에 가서 상을 치르고 왔다. 올해로 연세가 연세가 86세시고 내가 군대에 있던 2년 전부터 암 치료 불가 판정을 받으셨던 분이라... 장례식장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슬퍼하셨지만.
묘하게도...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는 별로 슬프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엔 시신을 직접 봤는데도 그렇다. 매년 신정 때마다 외할머니 댁에 가곤 했는데... 이제 못간다는 생각을 하니 묘한 기분이 드는 정도다. 내가 이상한 걸까. 감정이 완전 메말라버렸나.
장례식을 대전 성모병원에서 했는데 그쪽에서 식 절차의 상당 부분을 대신 처리해주어서 할아버지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편했다. 일단 음식 대접을 병원 소속 아주머니들이 해주시고 에어컨도 빵빵하고. 고3 때 시골에서 했던 장례식은 그 죽을 것 같았던 더위 속에서 상복 입고 음식 나르던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슬프고 지랄이고 없었다. 물론 봉분 올리던 날과 삼오제 지내던 날은 간이 천막으로 햇볕은 좀 가렸더라도 그 더운 날씨 속에서 상복 입고 일했지만 뭐 그 몇시간 정도야.
다만... 항상 그렇듯이 사람과 돈이 문제다. 공개된 장소에서 친척 흉보는 건 좀 그런데, 간단히 줄여 말하자면 장례식 전체가 단 한 명의 종교를 위해 진행되었다. 외할머니 자식이 자기 혼자인가. 게다가 그 과정에서 부은 돈이란... 그 사람들도 대단하지 각자의 구역까지 정해서 돌면서, 그 과정에서 돈까지 그렇게 받아챙기니 이건 완전 종교의 이름을 등에 업은 업자들 아닌가. 나는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그 시각에 대대적인 수정을 했다.
어머니가 깨워주셔서 일어나보니 7시 반이다. 레이드 뛰다가 2시 넘어 자서 군복이고 뭐고 안 챙겼는데…. 어쩔 수 없지.
10월에 보충 교육에 가야겠다. 수업도 제껴야 되고 시험 기간에 걸리면 X되는건데.
나는 늦게 깨웠다고 어머니에게 뭐라 한 적 없는데 원래 늦게 일어나서 맞추다 보니 늦었니 스스로 일어나라느니, 아버지가 예비군 훈련 제대로 갔는지 전화로 물으니 지금이라도 택시 타고 가라는데 애가 안 가느니, 그냥 착각해서 늦게 깨웠다 한 마디로 끝내시지 온갖 역정을 다 내신다. 벌써 늦었는데 택시 타서 뭐 어쩐다고. 아… 누구는 성질 낼 줄 몰라 말 안 하고 가만 있나.
앞으로는 알아서 가야겠군.
빨리 자면 밤에 공부 안 하고 빨리 잔다고 뭐라고 하고 늦게 일어나면 빨리 일어나서 학교 가서 공부 안 한다고 뭐라 하고. 집에서 4시간 자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자야 하나.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글짓기를 시키는 때가 있다. 독후감, 논설문, 고딩이 되면 논술. 수행 평가야 나 졸업하고 생겼으니. 난 그런 걸 정말 싫어했는데, 다들 글자 제한이 너무 심해서였다.
나는 다 아는 내용 일일이 쓰는 것보다 생략해버리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을 애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쓰면 되는거 아니가. 그래서 그렇게 써놓고 보면, 글자 제한의 반 정도에 글이 끝난다. 실례로는 경철이와 강 이야기를 보라. 묘사와 대화 좀 빼고 생략하면서 썼더니 요구량의 반이 나왔다. 귀찮고 뭣보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냈지만. 고등학교 논술도 늘 1500자 분량에 쓰고 보면 800~900자 분량.
어릴때야 폭력으로 강제하니 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별 의미도 뜻도 없이 자문자답하는 쓰레기글로 양을 메꿨는데, 완성된 글을 보면 당연히 그 중 반은 주제랑 아무 관련 없는 쓰레기. 좋은 점수 나올 리가 없지. 국딩 저학년 한 때 글 잘 쓴다는 칭찬을 들은 적도 있던 것 같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고 보면 글 쓰는 것 자체가 싫어지는게 당연하다.
블로그에 글 쓰는 건, 하고 싶은 말도 있지만 일종의 수련이기도 하다. 반년이 넘도록 진전이 거의 없는 건 슬픈 일이지만.
잡설이 길었는데, 기후의 역습도 최저 용량 제한의 희생물이다. 독후감 레포트인데 A4 5장 분량이란다. 12포인트 크기로. 그냥 쓴 건 양이 너무 적어서 다 지우고, 본문 내용 대충 베끼면서 양을 채우다 보니 이도저도 아닌 중딩 수준의 논설문이 된데다 결론도 한 물 간 개그다. 정말 한심하고 유치하다. 날짜 못 지키고 시험이 코 앞으로 닥치도록 찌질대면서 양 채울 바에야, 양이야 어쨌든 날짜 지켜서 내고 그 시간에 시험 공부나 할 걸 그랬다.
교양과정동에서 알고리즘 수업을 듣는 곳은 307호실이다. 전에 에어컨 틀었다고 쓰긴 했지만 사실 바로 옆에 거대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3층이라 바람도 많이 불기 때문에 창문과 문만 열어놓고 있어도 꽤 시원하다.
그래서 그날도 강의실 들어서자마자 뒷문 열어서 의자 괴어놓고 창문가의 제일 뒷자리에 앉아 창문 열고 있었다. 시원하두만. 내 앞 사람도 나 하는 거 보고 창문 열었고.
그런데 한 학우가 뒤로 오더니... 에어컨을 켠다. 그리고 온도를 18도로 맞췄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니, 에어컨을 켜려면 창문과 문을 다 닫든지. 아니면 다 열고 에어컨을 끄든지. 교실 뒷문과 뒤편 창문 2개가 열려 있는데 에어컨 켜봤자 효과 얼마나 나겠는가.
그날 축제 때문에 시끄러워서 창문 다 닫긴 했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에어컨은 켜기만 하면 시원해지는 마법의 장치가 아니다.
대구 공항 앞에 새 횟집이 문을 열어서, 가족끼리 하던 월 1회 외식을 이번엔 거기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가게였다. 요리사 2명 서빙 아줌마 3명이었고 자리는 10개 남짓... 물론 개장 초기니 사람은 많았다. 우리 가족 포함해서 예닐곱팀 정도?
나는 종류 불문하고 익지 않은 건 좋아하지 않는 성미라 부모님이 알아서 시켰는데 3만 원짜리 모듬회와 2만 원짜리 새까시(가 맞는지 모르겠다. 기억도 희미하다. 어쨌든 가자미를 뼈째로 썰었다던가 하는 회)를 주문했다.
술은 우리가 원래 마시는 메이커의 백세주가 아니어서 동생이 흑주 달랬는데 없단다. 원래 안 들여놨단다. 그럼 메뉴판에 흑주란 글씨를 지우던가.
...기다렸다. 오지게 안 나온다. 일단 자리에 앉으면 나오는 음식들부터가 양과 가짓수가 적어서 뭔가 허전했는데 거의 일이십분은 기다려서 회가 나왔다. 회 위엔 "포스트잇"이 얹혀있더라…. 회를 포스트잇에 싸먹으리? 5만 원짜린데 양도 무지하게 적고. 야채도 조금씩만 줘서 계속 다시 달라고 해야했다. 한 대여섯번은 불렀을 거다.
마지막으로 매운탕과 밥을 달랬는데 주문 받은 사람이 깜박해서 20분 정도 공쳤다. 다시 말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5분만에 갖다준다. 5분…. 틀림없다. 엄청 큰 통에 생선 대가리 몇십개 넣고 끓이다가 푹 퍼서 주는거다. 파나 양파 같은 거 얹어서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준다. 생선 대가리가 완전 해체 일보 직전이두만.
욕만 써놓은 거 같아서 몇마디 더 덧붙이자면 꽤 깨끗했고 고기는 싱싱했고 주인으로 추정되는 요리사도 친절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우리 가족이 회 먹으려고 할 때 고려하는 횟집만 십여개고, 그 중 가장 나은 집에 비교해봤을때, 이런 서비스로는 택도 없다. 우리 가족의 리스트에서 빨간 줄이 주욱 그어진 것이다. 안녕.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저녁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SBS 채널이었는데 생방송 투데이란 프로였다. 현충일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75 X 50(60?)미터의 거대 태극기를 북한강에 띄우는 행사를 보여줬다. 행사 자체는 그렇다 치고 취지와 행동과 인터뷰가 뭔가 상당히 어긋나 있었다.
"평화 통일을 기원"한다라. 반대로 생각해 보자. 북한에서 평화 통일을 기원한다고 거대 인공기만 만들어서 자기네쪽 북한강에 띄워놓고 인터뷰에 "한라산에도 걸고 싶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하루 빨리 통일해서 북한 어린이들과 같이 태극기를 그리고 싶다고? 꼬맹아, 그 얘기는 우리가 북한을 침략해서 걔들의 인공기는 다 불태운 뒤에 남한 식의 정치, 경제, 문화 체계를 폭력으로 강요한 뒤에야 가능하단다. 꼬맹이야 뭐 모르고 그랬다 치고 그걸 그냥 내보내는 SBS는 대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평화란 상대방을 반항을 꿈도 못 꾸도록 반쯤 죽여놓든가(미국처럼), 아니면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대화란 내가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내가 받아들이는게 더 중요하다.
대형 태극기라는, 남한의 상징만을 거대하게 걸어놓고 북한과 평화 통일을 하고 싶다고 백날 외쳐봤자 북한 사람들이 믿어줄까? 지금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도 같이 걸어야 하지 않을까?
별로 현충일 기념이라는 걸 무시하는 건 아닌데, 그럴거면 평화 통일 기원이라는 말은 하질 말든가.
말이 사촌형이지 앞에 '고종' 자가 붙고 보면 "누구세요?" 수준이다. 일단 나랑 나이 차이가 거의 띠동갑인데. 어렸을 때 만났을지 몰라도 사실 내 기억으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형도 날 못 알아보던데 뭐.
가는 것도 웃긴 게, 아버지에게서 가야 한다고 '통보' 받았다. 결혼 당일 사나흘 전에. 결혼식이 기말고사 겨우 일주일 전인데. 아직 애 취급이군.
교통편은 아버지 자가용. 10시 반에 나서서…. 1시 좀 넘어 도착. 부산역 근처인데다 예식장 둘이 딱 붙어 있으니 얼마나 사람과 차가 많은지. 한참 헤매다 간신히 주차하고(그나마 끝나고 와보니 딱지 받았더라) 들어갔다.
일단 어른들과 인사하고… 고모와 고모부와 숙부들은 알겠지만 나머지는…. -_-
결혼식은 그야말로 초간단. 식 자체는 20분 만에 끝났고, 나머지 1시간가량은 사진 찍느라 바빴다. 결혼식인지 사진식인지. 국적 불명의 예식장 장식들 전부가 모조, 싸구려 티가 너무 나는데다 방송용 장비라든가 사진기 등등의 장비들은 검은색이어서 식장의 기본 흰색과 전혀 안 어울리는 등 마음에 안 드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 중 압권은 나이트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명이었다. 빛으로 그려낸 글자 "부산예식장". 장난하냐? 조명은 어두운 편이었고, 때문에 비디오 카메라 들고 다니는 친구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등을 카메라에 부착하고 다녔다. 부신 정도가 아니고 아팠다.
어쨌든 끝나고 꼴에 뷔페라는 식당으로 갔는데, 이쪽도 무성의의 극치랄까, 뷔페도 뷔페 나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서울 숙부의 아들 제우의 돌찬치를 서울 힐튼 호텔에서 해서 눈높이 초기치가 너무 높아진 탓인가 하고 생각해봤지만, 김치는 화학 조미료 냄새가 팍팍 풍기는 제조 싸구려 김치였고 고기류는 다 딱딱했다. 가짓수도 적고. 전반적으로 식었고, 짜고, 느끼하고, 맛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배는 채웠지만, 제길.
예식장의 식도 그렇고 식당도 그렇고,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기서 식 올리려는 걸 막으려 들 것이다. 그딴 식으로 해도 장사 잘 되나 보지?
밥은 금방 먹었는데 어른들의 사정으로 무슨 잡담을 한참 하더니 고모부네 집으로 가잔다. 사전 협의한 사항이었다. 끌려가서 저녁 먹고 집에 와보니 9시였다.
일요일 하루 날린 건데. 진짜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막상 가선 얘기도 별로 안 하고 밥만 딸랑 먹고 왔으면서 뭐 그리 꼭 가야 한다고.
펌질을 아예 거부하는 건 아니다. 트랙백이 그냥 있는 기능은 아니지만, 아직은 제한이 많다. 그나마도 같은 블로그에나 통한다. 링크를 걸어도 그 수명은 그렇게 길지 않다. 결국, 자신의 의견을 펼치려면 그 원본을 들고올 필요가 있다. 혹은 흥미있는 이야기거나 해서 갖고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원본글을 "달랑 갖다 놓기만 하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주 압권인 블로그를 하나 본 적이 있다. 어떻게어떻게 링크를 타고 갔더니 3만개였다. 오오 3만 히트라니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봤더니 글 3만개... 아니 하루에 글 5개씩 올려도 20년은 족히 걸리겠다고 계산하면서 다시 봤더니 C&P의 결정체였다. 아무 코멘트 없이 그냥 글만 붙여넣기한 것이다. 물론 블로그 히트 수도 적었고 댓글은 아예 없었다.
위의 사례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포스팅이랍시고 뉴스 하나 붙여넣기만 해둔게 다인 블로그는 대단히 많다. 그게 진짜 희귀한 정보면 말도 안 한다. 넷 찌라시의 개나소나 다 아는 포스트가 뭐 그리 희귀하고 귀중하고 신기해서 자기 생각 한 줄 안 쓰고 붙여넣기만 딸랑 해두는 건지.
도대체 뭘 위한 블로그인가? 아니면 내가 블로그란 것에 대해 오해 내지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블로그에 새로운 정보를 찾으러 가는게 아니다. 새로운 정보면 정통한 소식통이 널리고 쌓였다. 난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보러 블로그를 검색하고 찾아다니는거다. 그런데 검색 결과의 절반 이상이 해당 기사의 단순한 복제라니... 정말 그들은 원본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냥 붙여넣기만 해둔 걸까?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면 애시당초 붙여넣어서 포스팅할 이유가 없을텐데. 이해가 안 된다.
왜 블로그를 1인 언론이라고 부르는가. 기사 두 페이지에 달랑 한 줄이라도 좋으니, 자기 블로그엔 자기 의견과 주장을 써라. 스스로를 C&P 기계로 만들지 말라.
덧글 - 수많은 블로그 활용법 중 가장 열받는 건 자기 블로그를 통해 네티즌 낚시질을 하는 ㅆㅂㄹㅁ였다. 재미있냐? 엉? 자기 글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찮고 우습게 보였으면 그런 짓거릴 할까. 아 쓰다보니 새삼스레 열받네 이거.
나는 우리 집에서 비교적 짜게 먹는 편이다. 어머니가 가장 싱겁게 드시고, 동생이 중간, 아버지와 내가 가장 짜게 먹는다. 하지만 그런 나도, 밖에서 상인들이 파는 음식은 짜다고 느낀다. 그들은 그런 음식을 팔 수 밖에 없다. 건강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든 간에 그들은 먹는 이가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자극적인 음식을 만들어서 팔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짠맛과 지방의 맛. 과거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했던 성분들이다.
그런데 학생식당의 음식은 지방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짜기는 오지게 짜다. 정식은 괜찮은데, 특식이 매우 심하다. 앞서 썼듯이 특식은 덮밥 형식인데 그 국물에 염분이 상당히 많다. 신입생 때 멋 모르고 그냥 먹을 땐, 점심 먹고 집에 가서 저녁 먹을 때까지 소변 볼 일이 없었다. 과거 산업화 시절 화장실 갈 일도 없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짜게 먹였다는 이야기가 연상될 정도.
지금은 아예 접시를 기울여 국물을 분리해서 먹는다. 다 먹고 보면 남는 국물의 양이 일반적인 물컵의 절반 가까이 될 정도다. 저걸 다 마신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 밥 먹는 걸 빤히 보는 취미는 없지만, 보면 다 같이 비벼서 먹는 사람도 꽤 있는 편이다. 그거 짜지 않나? 그 정도면 생존에 필수가 아니고 거의 독 수준이다. 식당엔 영양사도 있던데 방치하는 걸 보면, 학생식당도 역시 이익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생물의 세계 강의의 레포트다. 3,000 ~ 5,000자 이내로 과학 동화를 쓰시오. 세상에 소설을 쓰라 해도 힘든 판에 아이들 눈 높이로 동화를 쓰라니! 어쩔 수 있나. 쓰라니 썼다. 과거 경험을 되살려 어떻게 어떻게 써서 3Kbyte 채워서 이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보내놓고 생각해보니 교수님이 생각하는 한글 3천자와 내가 생각하는 3Kbyte는 엄연히 다르다. 이런. 교수님과 내 사고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깜박했다. 허나 이미 보내버린 것을 어쩌리. 양이 절반이면 점수도 절반이려나.
경철이는 바닷가에서 살았었습니다. 그곳에서 노는 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친구들도 많았고, 바닷가에 놀러나가면 언제나 놀거리가 많았으니까요. 말미잘도 있었고, 갯강구가 돌아다녔고, 갯지렁이도 흔했습니다. 물론, 바다니깐 바닷물고기도 많았지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경철이는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큰 도시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셨거든요. 친구들은 경철이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면서, 경철이에게 잘 가라고 작별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몇 명은 도시로 가게 된 것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큰 도시에는 분명히 멋진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경철이는 부푼 가슴을 안고 도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경철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큰 건물도 많고,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지만, 길은 복잡하고, 매연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고, 쌩쌩 다니는 차들 때문에 길을 걸어다닐 땐 조심해야 했습니다.
경철이가 사는 곳 옆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비하면 작지만, 꽤 큰 강이었지요. 경철이는 옛날에 바닷가로 놀러갔던 것처럼, 새로 사귄 친구들과 강으로 가서 놀고 싶어했지만 왜인지 친구들은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싫어한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경철이는 친구들과 헤어지면, 가끔 혼자서 강으로 놀러나가곤 했습니다. 그 강은 경철이가 알던 바다와, 명절 때마다 가던 할아버지댁에서 보던 시냇물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물빛은 항상 탁했고, 바닥은 이끼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물에선 냄새도 났습니다. 바닷물에서도 특유의 냄새가 났고 시냇물에서도 독특한 냄새가 났지만 강물의 냄새와는 달랐습니다. 아주 희미하긴 했지만 맡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냄새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경철이는 강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조금 깊은 물이었지만 들어가서 그것을 건져올렸습니다. 그건 물고기였습니다. 덩치가 커다란, 경철이 팔만한 물고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의 꼬리는 기역자로 휘어있었습니다. 방송에서 많이 얘기하던 기형 물고기였던 것입니다. 경철이는 그것을 보고 당황해서 물고기를 놓쳤습니다. 그 물고기는 헤엄도 잘 치지 못하고 천천히 물에 떠밀려 내려갔습니다.
경철이의 부모님은 그 얘기를 들으시고, 역시 도시의 강이라 오염이 심하니 가지 않는게 좋겠다고 하셨고, 경철이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강에 갈 시간도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시골에 갔다가 공무원으로 일하는 사촌형을 만났을 때, 경철이는 물고기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형이 설명하기로는, 물 속에는 많은 미생물이 있어서 뭔가 나쁜 물질이 들어오면 그것들을 분해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시의 강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쓰레기와 더러운 물을 너무 많이 버리기 때문에 미생물이 미처 다 분해하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그런 물을 마시는 물고기와 다른 생명체들이 아파하게 되고 그런 기형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번 오염된 강은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년부터 몇십년까지 걸린다고 합니다.
그 뒤로 강을 살리자는 운동이 일어, 어른들이 강 주변을 청소하고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는 등의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제는 강에는 물고기도 많이 보이고 철새도 자주 날아듭니다. 하지만 아직은 강바닥도 깨끗하지 않고, 물에서 노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언제쯤이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가끔 강변에서 쓰레기를 주으며, 경철이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구 온난화가 날이 갈수록 가속화하여 잠자리가 1년 중 반 이상 날아다니고 모기는 연중으로 날뛰는 가운데, 올해는 그 정도가 더 극심해져서 봄은 없어져버리고 이제 여름으로 접어든 듯 싶다. 아직은 그정도는 아니지만 조만간 열대야도 찾아올 것이고... 대구는 미치게 덥다.
경북대학교는 오늘부터 전 건물에서 에어컨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시원한 건 좋지만, 5월 시작부터 에어컨이라니. 여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그 빨라지는 것 자체가 가속하는 느낌.
그동안 운동삼아 하교길은 걸어서 집까지 왔는데 기온이 올라가니 공기 자체가 사람 숨통을 꽉 조여서 이젠 도저히 그렇게 못할 듯. 매연도 매연이고 뜨거운 공기가 폐를 말리는 기분이다.
필기 시험 1차에 합격, 장내 기능 1차에 합격, 그리고 도로 주행도 1차에 합격했다. 돈과 사진도 다 냈고, 월요일에 운전 면허증을 찾아오기만 하면 된다.
실제 교습은 13일에 끝났는데, 시험은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친단다. ...아니 필기는 수시고 장내 기능은 토요일인데 왜 도로 주행은 화목이야. 학생이나 직장인은 어쩌라고.
그래서 학부가 연합 MT를 가버린 오늘 시험을 쳤다. 복학생이 MT 따위 가서 뭐하냐. 그저 학점과 취직에 매달릴 뿐이다. 사실 근래는 게임에 매달리고 있는 쪽이지만... 으으.
강사 휴게실에서 대기하다가 참관인으로 뒷자석에 한 번 타고, 실제 시험으로 1번 탔다. 시험용 차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진짜 공장에서 바로 출고라도 된 듯한 완전 새 차. 약간 뻑뻑했지만 적당히 길든 학원차와는 달라서 컨트롤에 애먹었다. 게다가 옆에 탄 시험관은 강사인지 시험관인지 이래라저래라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_=
내가 탔던 게 마지막에 가까운 시험이라, 참관인이 없었다. 그래서 1번은 다른 시험관의 차에 참관인으로 타고, 저 잔소리 아저씨의 차에 마지막으로 탔다.
때마침 눈이 왔는데, 그걸로 얘기하다가 울릉도로 화제가 옮겨갔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독도 이야기.
...아저씨 폭주! 일본 욕과 노무현 잘했다로 시작해서 한국 힘 없다, 미국 이야기, 자주 국방, 박정희, 지역 감정... 정치에 완전 관심 끊지 않았다면 누구나 할 말이 많은 화제들로 왔다갔다 하면서 긴 연설을 토하시는데... 불행히도 '대화'는 아니었고, 젊은 것들 둘에게 '교육'을 시키실 목적이셨는지 출발부터 도착까지 장광설을 들었다. 점수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 덕 좀 봤을게다. 시험관 아저씨는 말하기 바빠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내 사수를 보았다. 내 부사수도 함께 있었다. 내 부사수의 1달 후임인 작전과의 녀석의 부사수까지도(제대할 때까지 안 들어온) 본 것 같다.
나는 꿈의 시작에서 작전과의 부사관에게 깨졌다(원래의 대대 작전과엔 작전장교 밖에 없었다. 대대가 갑자기 연대급으로 커진 것 같다). 애들 안 챙긴다고, 신경 안 쓴다고 깨진 것 같다. 그리고 작전과 - 정보과 단합 체육 대회를 하러 1/4t를 타고 산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내 사수에게 부당함을 호소했다. 내 사수는 내가 무슨 얘기할 때마다 늘 짓던, 반쯤 비아냥대는, 반쯤 비웃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운전면허를 제외하고는 더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다시 생각해봐도, 난 애들을 신경 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 아니, 신경을 안 쓰기보단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 까, 애들이 내게 말하는 걸 기다릴 게 아니고, 내가 애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던 것이다.
도착해서 상근들과 합류해(현역이 10명도 안 되는데 상근은 30명 가까이 있었다), 신고를 하고 환복을 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군대 시절 상병 꺾인 이후 거의 1년 동안, 난 내 부사수와 분대의 애들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제대한지 1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꿈을 꿀 정도로 죄책감이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