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30. 11:15
어떤 사람이
* 어릴 때부터 판타지 문학을 좋아했고
* 그 중에서도 특히 로드 오브 더 링을 좋아했고
*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고
* 컴퓨터 게임(그것도 D&D 라이센싱)을 만들었으며
* 18 ~ 19 세기 프랑스(특히 군사학 쪽)에 관심이 많으며
* 집에 6대의 컴퓨터가 있는데다
* 소설 데뷔작이 판타지 소설인데
* 말하는 용이 나오는 19세기 초 근대 유럽이 배경이라면,
한국에선 이 사람을 뭐라고 불렀을까. 당연히 오덕후라고 불렀겠지. 넷에선 상하좌우로 까이고 평론가들은 책 이름만 들어도 귀에 오물이 튄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영화화? 님 정신줄 저기 있으니 어서 가서 주워오시죠?
하지만 천만다행스럽게도 저자는 한국인이 아니며 소설도 영어로 씌어졌고 출판된 곳도 미국이었기에 이 소설은 많이 팔렸고, 평론가들에게도 극찬을 들었으며, 결국 영화화까지 결정되었다. 뭐 세상이라는 게 다 그런 거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기준보다 다른 사람의 기준(특히 돈벌이 여부와 평론가들의 애널 써킹)으로 덕후를 판단할지 몰라도 내 기준은 좀 특이해서, 이 저자가 댄디덕후에 밀덕후를 겸하고 있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이 생각은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다고 D&D를 도용이나 표절했다는 것은 아니다. 용 설정의 경우 D&D에 나오는 용 설정과 닮은 부분이 꽤 있긴 하지만 작가 자신의 확고한 설정으로 녹아든 듯 하다.
이 소설의 배경이나 기본 줄거리는 알라딘에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나오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것은 당시 생활상, 가상이긴 하지만 용을 활용한 공군 편제와 전술, 그리고 용과 사람들의 교감이었다. 특히 저자가 여성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읽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등장 캐릭터들 간의 교류랄까 교감이랄까, 그런 부분이 섬세하게 잘 묘사된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남자라 이렇게 쓰지 특정 취향을 가지신 여성분들께선 불타고 계셨다. -_-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반대로 전투 장면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전체 전략 상황은 지역 이름이 점령당했다거나 누가 거기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슬쩍 지나가는 정도였으며(당연히 한국인인 내가 지역 이름만 듣고 정황 파악이 될리가 없다) 한 권당 한 번 가량 나오는 전투도 대부분 한 번 붙어 투닥거리면 끝나버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힘들 정도. 소드마스터와 9렙 마법과 검강에 질렸지만 그렇다고 로드 오브 더 링이나 앰버 연대기 같은 소설인지 철학서인지 알쏭달쏭한 류는 싫다면, 한 번 읽어보자. 후회는 없을 것이다.
P.S.: 권당 12,000원은 좀 아프다. 물론 사서 보진 않았지만. 약간 변명을 하자면 서점에서 앉아서 봤다. 요새는 동지도 많두만.
P.S. 2: 이 소설은 이 작가의 삶의 일종의 총체다(덕후식으로 말하자면 십몇년 묵은 뇌내망상의 결집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판타지 소설과, 직업으로 만든 게임과,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근대 유럽사를 조합한 것이다. 이것은 이 작가의 첫 소설인 테메레르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테메레르가 끝나면 "그 다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프로 작가라면 매작품마다 상세한 자료 조사를 통해 항상 이 정도 퀄리티나 혹은 그 이상을 내줘야겠지만... 그런 사람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테메레르의 상업적 성공에 만족하지 말고, 좀 더 정진해주었으면 한다. 당장 테메레르를 봐도, 글의 퀄리티는 그렇게 높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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