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5. 26. 23:02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 내가 학교에서 배운 생태계의 구성요소다. 그럼 기생충은 어디에 들어갈까. 미분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생충이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적다면 미분류로 해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잠깐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러시아의 툰드라에 있다. 때는 겨울이고, 눈보라치는 새하얀 설원을 순록 떼가 달리고 있다. 그 뒤를 한 무리의 늑대 떼가 쫓는다. 순록 떼에는 여러 개체가 있지만 쳐지는 것은 늙은 것과 병든 것이다. 늑대 떼의 수장은 덩치가 더 크지만 잡기는 더 쉬운 병든 것을 택한다. 하지만 그 "병든" 것은 사실 늑대를 최종 숙주로 하는 기생충의 유충이, 중간 숙주인 순록의 폐를 망가뜨린 것이다. 기생충은 순록을 죽여 최종 숙주인 늑대에게로 옮겨간다.
기생충이 없다면 어떨까. 병든 것이 사라지게 되니, 늑대가 손쉽게 잡을 수 있는 개체는 늙은 것만 남는다. 늙은 것을 다 잡아먹고 건강한 놈을 노리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게 되며, 결국 늑대의 개체수는 줄어든다. 건강한 순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니 평야는 초토화되고 순록은 엄청나게 굶어죽는다. 혹한의 그 땅에서 시체는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남을 것이다.
잡아먹히는 생물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잡아먹는 생물은 잡아먹기 위해 무한의 군비경쟁을 해왔다. 기생충은 그 사이에서 생태계의 순환을 좀 더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기생충은 진화의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태계 전체의 관점에서야 어쨌든 기생충은 개개의 생명체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그것도 자신의 몸 속에서. 때문에 숙주들은 몸 속의 면역계를 격렬하게 진화시키고, 자신의 자손을 남기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기생충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역시 격렬하게 진화한다. 도태되는 쪽은 죽는 것이다.
이 과정의 가장 인상적인 산물은 '성'이다. 무성 생식을 한다면 수천 수만의 자식 중 한둘만이 다른 형질을 띠고 태어나게 되지만, 유성 생식을 한다면 단 몇만 낳아도 그들의 유전자는 각각 모두 다르게 되며, 이쪽이 온갖 병과 기생충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더 다양한 형질을 확보하게 해준다.
위의 예는 기생충의 역할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을 인간이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쓰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공중 보건이 고도로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고 있어 기생충의 존재를 잊고 살며, 가끔 접하게 될 때에도 평가절하하게 된다. 기생충이 걸린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며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제 3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인간이 아닌 모든 생명체에게 기생충은 일상이며 그들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니다.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어느 쪽이 정상인가?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제작비만 잔뜩 들였지 재미도 없는 스릴러나 공포물을 보는 것보다, 이 책을 한 번 보라. 생태계에 드리워진 거대한 기생충의 그림자를 보라. 기생 과정의 리얼한 묘사와 몇장의 사진이,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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